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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고재흠 ‘가을 서정(抒情)’..
문학여행

[수필산책] 고재흠 ‘가을 서정(抒情)’

신영규 기자 shin09ykkk@hanmail.net 입력 2022/09/02 22:40 수정 2023.03.17 22:14

[뉴스비타민=신영규기자]

 

▲수필가 고재흠

 

 

 

 

 

 

 

 

 

 

 

 

 

 

 

 

가을이다. 황홀한 가을이다. 온 산은 진초록 비단으로 치장을 하더니 이제 형형색색 단풍으로 단장하고 있다.

들녘의 논밭에서는 황금빛으로 물들인 곡식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고, 과일밭에서는 농익은 과일들이 짙은 향을 풍기며 손님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 가을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정감을 우리 인간들의 가슴에 한 아름 선사하고 있다.
올해는 비와 바람이 적정하게 일어 풍요를 구가(謳歌)하는 해라 하겠다. 특히 우리 집에서는 내변산 토종 가시오가피를 재배한 지 10여 년이 된다. 그런데 금년에는 유난히 키도 크고 열매도 많이 열어 풍작을 이뤘다. 10월 말경 수확을 앞두고 즐거운 비명이다. 정말 희열에 젖은 희망찬 가을이다. 한편 농부들이 봄·여름 혹서를 가리지 않고 풍작을 위해 흘린 땀 값은 가을에 보상받는 것이리라. 그 또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내 유년 시절 보아온 가을의 정취를 떠올려 본다. 먼 시야에 펼쳐진 초가지붕, 그 위에 덩그러니 매달린 하얀 박이며, 누렇게 익은 호박들이 뒹굴 때면 이제 본격적으로 결실의 계절임을 느꼈었다. 앞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붉은 고추를 햇볕에 널어 말릴 때면 마치 푸른 하늘을 동경이나 하듯 희열감에 폭 파묻힐 때도 있었다.
그뿐인가. 고요한 밤이면 풀벌레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밤새껏 울어댈 때면 까마득하게 잊었던 추억들이 되살아나 한참을 이루지 못했던 그 눈물 어린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 와선 가을 하면 단풍이 마음 전폭을 가득 메우니 단풍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 뜨겁고 화려한 꿈을 불꽃처럼 피어오른 단풍, 그러한 단풍이 정말 좋게 느껴진다. 저처럼 나의 인생도 최후를 아름답게 장식할 수 없을까. 티 없이 맑은 파아란 하늘 아래 마지막 한 생명을 불태우다 말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봄은 새싹의 계절이요. 약동의 상징이며 성장의 심벌이다. 여린 새싹과 더불어 나의 꿈도 키워 왔다. 봄에서 출발하여 푸르름으로 변한 젊음의 표상, 성하의 절기에는 온 산하가 청록색으로 치장하고 무궁토록 생기발랄하게 유지될 것 같았지만, 계절의 변화에는 할 수 없이 단풍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리라.
나는 성하(盛夏)로부터 여러 가지 삶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었다. 초목의 싱그러움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을 얻었고, 풋열매를 형성하고 그것을 영글게 키워나가는 모습에서 노력과 꾸준한 근면성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의 기상에서 미지의 세계로 발전하는 도약의 힘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숲에서 귀가 따갑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면 청춘을 찬미하는 환희의 합주(合奏)를 연상시켜 주었다.
가을은 여름 내내 키웠던 열매들이 영글어 익어가는 때이다. 온갖 과일들이 자기의 특성을 자랑하면서 알알이 무르익고, 논이나 밭에서 자란 오곡이 푸른빛을 탈색하여 각양각색으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요 황금의 계절이며 결실의 계절이다. 사람으로 치면 불혹에서 이순(而順)까지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올해 봄 채소밭 귀퉁이에 호박 3폭을 심었다. 예부터 호박은 어느 채소보다 번식률이 좋은 식물이다. 어찌나 넝쿨이 무성하게 뻗었던지 50여 평의 밭이 호박밭으로 변하고 그야말로 호박 세상이다. 주렁주렁 주먹만 하게 매달은 열매들이 이젠 축구공 몇 배 크기로 누우런 호박 본연의 색깔로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그 또한 보는 기쁨이요 수확의 즐거움이다.
깊어가는 가을, 저 파아란 하늘, 끝없이 트인 가을 하늘을 오늘도 한없이 바라본다. 지난날 내 젊은 시절, 그렇게 즐겨보던 하늘이 아니었던가. 그때에 바라본 저 하늘은 그저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응시해본 하늘이었다. 한국전쟁 후유증으로 그 당시 국가도, 사회도, 나의 가정도 한결같이 가난할 때였던지라 초근목피로 연명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가난이 미래의 꿈마저 삼켜버릴 수 없었기에 나는 그러했었으리라.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힘든 세상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를 겪었고 광복을 맞았으며 6・25 한국전쟁을 거쳐 5·16 군사정부를 시작으로 31년간의 군사정부를 마감하고 이제 문민정부로 평온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순탄하게 가꾸어진 꿈보다는 차라리 눈물을 삼키면서라도 기어이 희망을 찾겠노라는 그 비장한 꿈이야말로, 참으로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봄에 뿌린 씨앗이 여름에 온 세상을 푸르름으로 펼치더니 가을을 맞아 오색 단풍으로 탈색을 한다. 겨울을 맞으면 우수수 낙엽이 진다. 그야말로 개골산(皆骨山)이다.
어쨌든 우리 인간은 순환의 이치를 겪으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가을의 한 허리이다.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갈 인생이기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것이리라. 인간은 누구나 본향으로 떠나는 것. 그러기에 소년의 기도와 같은 단정한 자세가 필요하기도 하다. 자연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자연의 섭리대로 이루어진 꿈. 이 가을의 단풍이 엮어낸 꿈을 나는 실현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본향의 꿈을 불태우고 싶다.



고재흠 수필가는 2000년 5월 월간 <문학공간>에서 수필로 등단하였으며, 한국 신문학 전북지회장, 행촌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전북수필문학상, 부안문학상, 부안군민문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전북일보·전북도민일보 칼럼 필진이었으며, 수필집과 문화칼럼집 등 5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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